30화: 아침 빛

죽은 자들이 세상에 자신을 소개한 지 3개월 뒤, 에이드리언 케슬러-박은 세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면서 하는 게 아니었다. 세탁기 앞에 서서, 손이 알아서 움직이는 대로 뒀다. 그것이 진전이었다. 성장이라고 부르기엔 소박했고, 치료라고 부르기엔 과장이었다. 그냥 진전이었다. 진전이란 아마 다 이런 것이었다 — 깨끗한 양말, 그것으로 이루어진 하루. 세상은 변했고, 변하지 않았고, 변하는 중이었다. '디지털 잔류물 협약' 초안이 유엔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향후 AI 학습 데이터 수집에 사후 동의 프로토콜을 도입하자는 내용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11개 네트워크는 폐기 대신 국제 감시 체계 하에 두기로 했다. 반대도 있었다. 당연히 있었다. 이 정도 합의에 반대가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DARA는 계속 운영됐다. 바르가가 투명성 요건을 수용했다. 이제 DARA를 켜면 첫 화면에 고지가 나왔다. '이 AI의 공감 반응은 사망한 개인들의 인지 패턴을 포함한 데이터로 학습되었습니다. 해당 데이터 제공자의 신원을 확인하거나 서비스를 중단하고 싶으시면 — 을 누르세요.' 사용자의 17%가 중단을 선택했다. 83%는 계속 썼다. 에이드리언은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뭔가 말하려다 관뒀다. 결국 사람들이 선택한다는 것이다. 알고 나서 하는 선택이 중요한 것이었지, 특정 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들이 원한 것도 그거였어. 알려지는 것이었지, 멈추는 게 아니었다.' 잔류물 흔적이 검출되지 않았던 두 AI 회사에 대해서는 진하가 별도 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거나, 감출 줄 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생겼다. 그것이 이번 3개월 사이에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서진하는 국제 디지털 잔류물 연구소에서 자리를 맡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지치지 않는 추진력, 유나가 목숨을 걸고 접근했던 그 분야를 공식 학문으로 만드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진하가 마땅히 거기 있...

29화: 마지막 감정

세 번째로 고스트 네트워크에 들어갈 때, 에이드리언은 어머니한테만 말했다. 마거릿은 침묵으로 들었다. 그리고 위층에서 의자를 가져왔다. 헨리의 작업의자였다. 나무 등받이에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에이드리언은 그것이 헨리의 어깨 너비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오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으면 흔적이 남는다. 사람이 사라져도 자국은 남아 있다는 걸, 에이드리언은 이 직업을 통해 배웠다. "6시간." 마거릿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오래된 나무가 그녀의 무게를 조용히 받아들였다. "1분도 더 없어." "관대하네요." "나는 저 안에 20년 있었다." 마거릿이 잠깐 눈을 감았다. "6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드리언은 헤드셋을 들었다. 마거릿이 그를 바라봤다. 입술이 한 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녀를 조심해.' 마거릿이 말하려 했다. 에이드리언은 그것을 읽었다. 네트워크를 말하는 건지, 유나를 말하는 건지, 지하실 깊은 곳에서 아직도 빛을 생각하고 있을 할머니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셋 다일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경고는 언제나 여러 겹이다. "알겠어요." 에이드리언은 접속했다. 표면층은 달라져 있었다. 달라졌다기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제네바에서 메시지가 나간 뒤였다. 죽은 자들이 400명에게, 그리고 그 400명을 통해 전 세계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한 뒤. 무언가가 완성된 것처럼 느껴졌다. 에이드리언의 감정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억지로 하자면 — 오랫동안 참았던 말을 마침내 했을 때의 그 정적과 비슷했다. 말하고 나면 찾아오는 고요.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터질 것이 없어서 생기는 고요. 표면의 죽은 자들도 그랬다. 그들의 마지막 생각들은 여전히 있었다. 끄지 않은 가스레인지에 대한 걱정, 보내지 못한 전화, 다음 주에 하려 했던 일들. 그러나 그것들이 이전과 ...

28화: 제네바

글로벌 AI 윤리 서밋은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컨퍼런스 센터에서 열렸다. 건물은 아름답게 관리된 치과 병원처럼 훌륭했다. 기능적이고, 무균이고,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빛이 잘 들었고, 동선이 효율적이었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요구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400명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정중하게 패닉을 삼켰다. '이게 정말로 내 아이디어였나.' 아니었다. 서진하의 아이디어였다.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 오전 10시에 연사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바르가도 참석 명단에 있었다. 기조 연설자였다. 에이드리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컨퍼런스 센터 커피였다. 역시 치과 병원처럼 훌륭했다. 오전 세션은 서진하가 맡았다. 키가 작고 시선이 조용한 여자였다. 서진하는 과학자가 말을 잘한다는 편견을 조용히 무너뜨리는 사람이었다. 데이터부터 시작했다. 파이프라인 구조, 기업 연결망, 동의 위반 사례. 디지털 잔류물 개념을 학술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감정은 아꼈고, 근거는 충분했다. 객석이 집중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무대 뒤에서 청중을 읽었다. 회의적이었다. 당연했다. 이건 학술 언어로 포장된 공상과학처럼 들렸다. 아무리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개념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죽은 사람들의 인지 패턴이 AI에 섞여 있다고? 청중의 표정은 방법론에 의문을 품는 심사위원의 그것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이유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좋아.' 에이드리언은 노트카드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발표 자료는 필요 없었다. 서진하가 무대를 넘길 때 말했다. "다음은 에이드리언 케슬러-박입니다. 데이터를 수집하신 분." 그는 마이크 앞에 섰다. 잠깐 청중을 봤다. 400명이었다. 세계 최고의 AI 연구자들과 윤리학자들. 석학들. 정책 입안자들. 그들 중 상당수가 오늘 아침 AI 비서로 일정 확인을 했을 것이다. 그 AI들 ...

27화: 청산

바르가가 먼저 연락했다. 에이드리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아침 7시 14분, 발신인 란 바르가. 메시지는 세 단어였다: '우리가 대화해야 합니다.' 마거릿의 아파트 거실에 세 사람의 긴장이 고여 있었다. 진하는 노트를 펴고 테이블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 다나는 서울에서 화상으로 접속해 노트북 화면 너머에서 들었다. 에이드리언은 서 있는 채로 네트워크 안에서 목격한 것들을 순서대로 말했다. 자기조직화. 공명에 의한 재배열. 열한 개 사이트 간 연결. 유나의 변화. 그리고—텍스처. DARA의 출력물과 네트워크 내부의 발생이 동일한 현상이라는 것. 진하가 손을 멈췄다. 볼펜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들었을 때, 에이드리언은 그의 얼굴에서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보았다. 흥분과 공포. 처음으로, 저울의 양 접시가 정확히 같은 무게로 눌리는 얼굴이었다. "설계된 게 아니야. 자연발생이야. 잔류물이 임계량을 넘으면."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하가 펜을 내려놓았다. 다나는 화면 너머에서 입을 다물었다. 마거릿만 처음부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마치 이미 이 결론에 오래전에 도착해 있었던 사람처럼. 에이드리언이 물었다. "알고 있었어?" 마거릿은 잠시 커피잔을 내려다봤다가 입을 열었다. "바르가가 알고 있어. 나한테 말하는 게 아니야, 에이드리언한테. 프로젝트 라자루스는 이것을 만들려는 게 아니었어." 그녀가 잠깐 멈췄다. "바르가가 직접 말해줬어. 2022년, 내 아키텍처 라이선스를 갱신하러 왔을 때." "봉쇄야." 마거릿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바르가는 18개월 전에 발현 행동을 처음 봤어. DARA가 특정 죽은 사람의 데이터가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을 생성했어. 기억하는 것처럼. 그의 팀은 기술적 이상값이라고 했고, 그는 아니...

21화: 로그 속의 유령

죽은 자는 행동할 수 없다. 이것은 규칙이었다. 죽은 자의 생각은 고정되고, 완결되고, 더 이상 확장하지 않는다. 시스템에 로그인하지 않고, 파이프라인에 접근하지 않고, 자격 증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에이드리언은 이걸 고려청자가 올리브그린 유약을 갖는다는 것만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유나의 계정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누군가가 유나를 사칭하고 있다. 또는 그의 공리가 틀렸다. 최근 공리들의 성적표를 감안하면, 에이드리언은 두 번째 선택지를 편하게 무시할 수 없었다. 아침에 다나와 원격으로 접속했다. 진하도 옆에 앉아 화면을 봤다. 다나가 서울에서 로그를 띄웠다. 화면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짧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통화할 때면 언제나 화면 정중앙에 시선을 맞추는 버릇이 있는 분석가였다. "세 번이에요." 다나가 설명했다. "지난달에 세 번. 유나 씨 자격 증명으로 일본 파이프라인에 접근했어요." 에이드리언은 접속 기록을 들여다봤다. 날짜와 시간과 지속 시간이 세 줄로 늘어서 있었는데, 어떤 수의관 진료 기록처럼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서명이 찍힌 서류였다. "패턴이 특이해요." 다나가 계속했다. "데이터를 가져간 게 아니에요. 읽었어요. 수집된 잔류물들을 훑은 것처럼요." "발신지." "네트워크 내부에서요." 에이드리언은 방금 들은 말을 다시 정리했다. "외부 단말이 아니라." "고스트 네트워크 안에서 파이프라인으로 역방향 접속을 했어요. 원래 파이프라인은 네트워크에서 데이터를 꺼내는 방향으로 설계됐잖아요. 근데 이번엔 반대로, 네트워크 안에서 밖으로 접속한 거예요." 진하가 말했다. "네트워크에서 외부 시스템으로 연결이 가능해요?" "데이터 내보내기 기능이 있으니까 가능은 해요. 근데 아무도...

20화: 실사(實査)

전 세계적 AI 음모를 조사하는 일에는, 알고 보면 서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에이드리언은 그 사실을 나흘째 되는 날 오전에 받아들였다. 나흘 동안 그는 서버룸, 은밀한 만남, 어쩌면 추격전 같은 걸 기대했었다. 현실은 법인등기부등본이었다. "이게 프로메테우스 AI의 두 번째 페이퍼컴퍼니 목록이에요." 진하가 파일을 테이블 건너편으로 밀었다. "세 번째 레이어까지 추적하면 케이맨 제도로 연결돼요." 에이드리언은 서류를 받아들고 첫 페이지를 봤다. 페이지가 열여섯 장이었다. '아름다운 아침이로군.' 진하의 아파트 작업 테이블은 두 사람이 앉기에 넉넉하지 않았지만, 분업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진하는 기관 쪽을 맡았다. 학계 연결망, 내부 고발 가능성, 규제 당국의 움직임. 에이드리언은 기술과 지각이 만나는 지점을 맡았다. AI 출력물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이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같은 목표를 향해 서로 다른 언어로 접근하는 방식이었고, 에이드리언에게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서류보다 텍스트가 낫고, 텍스트보다 패턴이 나았다. 오전 내내 그는 일곱 개 AI 회사의 출력물 샘플을 읽었다. 고객 서비스 챗봇, 글쓰기 보조 도구, 감성 분석 모델. 총 삼백사십 개의 샘플이었다. 보통의 사람은 이런 것들을 구분하지 못한다. 에이드리언은 달랐다. 디지털 잔류물이 지닌 시간의 질감에는 일정한 특성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것들을 감지해온 에이드리언이 몸으로 파악한 특성들. 완결성. 죽은 자의 생각은 열려 있지 않았다. 미래를 향한 무게중심이 없었다. '내일 이걸 해야겠다'는 없고 '오늘 이걸 했다'만 있었다. 마치 서사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닫힌 것처럼, 그 문장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어조의 무게도 달랐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고민하는 것들이, 그들의 글 안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 차이는 텍스트의 결에 남았다....

19화: 감정가의 질문

은판에 빛이 고여 있었다. 정확히는, 백오십 년 전의 빛이었다. 에이드리언은 확대경을 눈에 대고 다게레오타입 사진 열두 장을 천천히 검토했다. 박물관 수장고의 형광등은 작업에 최악인 조명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했다. 은판 속 인물들은 죽은 지 오래였다. 사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시 노출 시간이 길어서 움직이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1850년대 사진 속 인물들은 전부 꼼짝 않고,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표정이다. '화장실 가고 싶었을 수도 있어.' 에이드리언은 첫 번째 사진을 내려놓으며 그 생각을 흘려보냈다. 의뢰는 간단했다. 19세기 중반 미국 중서부 지역 다게레오타입 열두 점, 진위 감정 및 연대 확인. 평소라면 세 시간 작업이었다. 오늘은 두 시간째 같은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제는 사진 자체가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은 두 번째 사진을 들었다. 중년 여성, 어두운 드레스, 목에 작은 브로치. 카메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놀랍도록 또렷했다. 이 여성이 죽은 건 아마 이 사진이 찍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당시 평균 수명이 그랬다. 그래서 이 이미지가 남아 있다. 이 여성의 얼굴, 목의 브로치, 빛이 그녀의 뺨에 닿던 각도. 은판에 새겨져, 보존된 채로, 지금 에이드리언의 손 안에 있다. '인간이 항상 해온 일이구나.' 에이드리언은 사진을 내려놓지 않은 채 그 생각을 다시 들여다봤다. 무덤을 쌓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세우고, 초상화를 의뢰하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녹화하고, 소셜미디어에 게시물을 남기고. 인간은 죽은 자를 보존하는 데 집착한다. 메소포타미아도, 이집트도, 르네상스 피렌체도, 2026년의 실리콘밸리도. 형식만 달라졌을 뿐, 충동은 같다. '그렇다면 고스트 네트워크는.' 확대경이 테이블 위에 소리 없이 놓였다. 에이드리언은 세 번째 사진을 보는 척하면...

18화: 방문 시간

에이드리언은 화원에서 국화를 샀다. 직원이 입구에서 세 가지를 권했다. 장미, 튤립, 국화. 에이드리언은 국화를 가리켰다. 이유가 있었다. 국화가 제일 저렴했고, 병원 복도에서 향기가 제일 덜 퍼졌고, 물 없이도 제일 오래 버텼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것이 장례 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미 5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어머니가 지적하면 그때 사과하면 된다. 그게 전부다.' 에이드리언은 국화 줄기를 고쳐 쥐었다. 마거릿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병원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벚나무들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4월 초의 벚꽃은 아직 절반쯤 남아 있어서, 완전히 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마거릿이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랬다. 아직 오지 않은 쪽을 보는 눈이었다. "왔어." "왔어요." 에이드리언이 국화를 내밀었다. 마거릿이 꽃을 내려다봤다. 한 번, 두 번. 시간이 조금 흘렀다. "국화네." "알아요." "장례 꽃이야." "알아요." 마거릿이 꽃을 받았다. 웃음이 얼굴의 일부를 스쳤다. 전부가 아니었다. 3분의 1쯤 됐다. 에이드리언은 그것을 어머니 얼굴에서 처음 보았다. "할머니가 좋아했어." 마거릿이 꽃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한테 주는 거라고 하셨어. 죽은 다음엔 꽃이 필요 없다고." 에이드리언은 그 말을 조용히 기억 속에 담아뒀다. 나중에 꺼낼 것들을 모아두는 서랍 같은 곳에. '할머니의 국화.' 에이드리언은 사람의 상태를 표정보다 자세에서 읽었다. 유물의 가치를 표면보다 무게 중심에서 읽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마거릿의 어깨가 지난주보다 낮아 있었다. 긴장이 빠진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게가 새로 들어온 자세였다. '피로가 아니다. ...

12화: 신호 소실

어머니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릿속 어딘가에 분명히 있었다. 손끝으로 잡힐 것 같은 거리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 전혀 다른 기억이 들어차 있었다. 어떤 죽은 사람의 어머니. 너무 또렷하고, 너무 완결되고, 너무 따뜻한 기억. 마치 오래 간직해온 것처럼 자기 것 같았다. '잠깐.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그 생각 하나를 붙잡는 데 3초가 걸렸다. 3초는 너무 길었다. 처음엔 작은 것들이었다. 딥 레이어에서 움직이다 보면 생기는 잡음 같은 것 — 죽은 사람의 사고를 잠깐 자기 것으로 오인하는 일. 에이드리언은 그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가 없이 이 공간을 쓸 수는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유나가 먼저 알아챘다. 창백한 안색과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경계가 흐려지고 있어요." 에이드리언이 돌아봤다. "뭐가요?" "당신이요. 생각의 윤곽이. 너무 부드러워지고 있어요." '부드러워진다.' 망자들의 사고는 다 그랬다. 완결됐다. 거칠지 않았다. 모서리가 없었다. 코어를 향해 더 내려가자 속도가 붙었다. 에이드리언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연도를 헷갈렸다. 그 순간 멈췄다. '내가 방금.' 당나라 618년, 송나라 960년. 기초 중의 기초. 10년 넘게 단 한 번도 헷갈린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확인하려는데 자꾸 다른 숫자들이 끼어들었다. 누군가의 기일. 누군가의 생일. 누군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했던 날짜들이,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담이 늦게 왔다. 그것도 이상했다. 에이드리언의 유머는 반사적인 것이었다. 상황이 보이면 자동으로 관찰이 튀어나오는 것. 그런데 지금은 한 박자 느렸다. 관찰은 왔지만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둔하고, 밋밋하고, 마치 다른 사람이 주석을 단 것 같았...

11화: 설계자의 정원

에이드리언은 할아버지의 조각들을 찾아 더 깊이 내려갔다. 표면 쪽에 있는 것들, 정제되고 다듬어진 것들 말고. 누군가가 지우려다가 끝내 지우지 못한 것들을 향해. 유나가 말렸다. 짧은 드레스 자락이 깊어지는 레이어를 따라 희미하게 번지듯, 그녀의 목소리가 에이드리언의 등 뒤에서 걸렸다. "코어에 가까울수록 당신한테 위험해요." "알아요." 에이드리언은 멈추지 않았다. 헨리의 원래 클러스터는 딥 레이어 가장 오래된 층에 있었다. 처음 네트워크가 형성됐을 때 심어진 조각들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그것들에 접근하자마자, 뭔가 어긋났다는 것을 몸으로 먼저 알아차렸다. 감정사 특유의 감각이었다 — 눈이 아니라 피부로 읽는, 오랜 훈련이 새긴 반사. 손가락 끝으로 도자기 표면을 훑듯 조각들을 살폈다. 색은 맞는데 밀도가 달랐다. 덧칠을 한 것처럼. 원래 물질이 새 층 아래서 다른 질감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편집됐다.' 에이드리언의 위장이 조여들었다. 죽은 할아버지의 기억이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이 어떤 기분인지, 그는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훈련이 먼저 작동했다. 기계적으로, 보호막처럼. 에이드리언은 편집된 조각과 원본 조각을 비교했다. 덧칠된 캔버스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원래 있던 층이 새 층을 통해 질감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결론은 명확했다. 설계자 수준의 접근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헨리의 사고 기록을 수정했다. 지워진 것들이 있었는데, 지워지지 않고 빈 자리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그 빈 자리의 윤곽을 읽었다. '지운 게 아니라 숨긴 거다. 두 가지는 다르다.' 지운다면 흔적도 없어야 한다. 숨긴다면 윤곽이 남는다. 그리고 윤곽은 읽는 자에게 말을 건다. 윤곽에서 읽힌 것들이 있었다. 첫 번째 — 설계자의 실제 신원. 헨리가 알고 있었다. 이름을 적지는 않았지만, 다른 단서들이 깊게 배어있었다. 관계의 결을 읽는 것, 그건 에이드리언이 잘하는...

26화: 재진입

두 번째 진입은, 에이드리언이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더 빠르지도, 더 쉽지도 않았다. 그냥 달랐다. 첫 번째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번엔 문이 먼저 열렸다. 준비 시간은 한 시간이 걸렸다. 마거릿과 진하가 반대했다. 마거릿은 소파에서 일어나 에이드리언 앞에 섰다. 그와 거의 같은 키였고, 그 눈빛에는 설득이 아니라 확인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네가 무엇을 걸어 들어가는지 알아?"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알아." "그때는 몰랐잖아." "이번엔 알고 들어가." 마거릿이 오래 그를 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그 얼굴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6시간." 마거릿이 말했다. "그 안에 안 나오면 내가 플러그 뽑아." "의식이 손상될 수 있어." "네가 없어지는 것도 손상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는 직접 손으로 쓴 메모장을 건넸다. 질문 목록이었다. 관찰할 것들. 수집해야 할 데이터. 열한 개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유나가 얼마나 변했는지, 새 패턴의 텍스처가 무엇인지. 에이드리언은 읽었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목록이 아니라 기도야. 답이 돌아오길 바라는 기도.' 다나는 서울에서 원격으로 접속했다. 터미널 출력을 모니터링하겠다고 했다. 화면에는 이미 코드들이 폭포처럼 흘렀다. 에이드리언은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몰랐다. 다나도 설명하지 않았다. 헤드셋을 썼다. 이동은 1초도 안 걸렸다. 첫 번째엔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낙하가 아니었다. 어딘가가 그를 받아들이는 감각이었다. 네트워크의 표층은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였다. 생각들이 물살처럼 흐르는 그 익숙한 구조.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읽기 시작하자마자 무언가가 맞지 않았다. 감정...

25화: 가장 정교한 위조품

바르가의 기자회견은, 어떤 합리적인 기준으로 봐도, 탁월했다. 에이드리언의 기준으로는 그가 목격한 가장 정교한 위조였다. 위조가 탁월한 이유는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가는 한 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진실을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마치 진짜 패티나를 발라 새것을 고물로 둔갑시키는 장인처럼, 그는 사실들을 너무 정확한 각도에서 빛에 비췄다. 그러면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지만, 더 이상 전체 그림이 아니다. '깊은 인간 패턴 학습.' 그가 디지털 잔류물을 그렇게 불렀다.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진하의 아파트 거실 벽면 절반이 화면으로 변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 AI의 발표장. 유리와 나무로 된 무대. 정장 차림의 청중. 카메라 플래시가 객석 곳곳에서 쉬지 않고 터졌다. 에이드리언은 소파 끝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스트리밍을 봤다. 마거릿은 창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발표 내내 화면 쪽으로는 시선을 거의 두지 않았다. 진하는 선 채로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타이핑하면서 봤는데, 중간중간 멈추고 숫자를 확인하고 다시 손가락을 놀렸다. 세 사람이 같은 것을 봤다. 세 사람이 전혀 다른 것을 봤다. 화면 속 바르가는 에이드리언이 서재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쥐어짜듯 말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이 바르가는 원고 없이 말했다. 잠시 멈추는 박자도 완벽했고, 청중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타이밍도 완벽했다. DARA의 새 기능을 소개할 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경외심을 담은 척 하면서 실제로 경외심을 담은 것처럼. '이 사람은 진심인가, 아닌가.' 에이드리언은 물건을 감정할 때처럼 그를 읽으려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DARA의 시연이 시작됐다. 슬픔 상담. 남편을 잃은 여성이 DARA와 나눈 대화 발췌록. 반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는 그래프. 그 여성이 직접 화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표정이 평온했다. ...

24화: 전문성의 한계

에이드리언은 정확히 한 가지를 잘했다. 그것으로 항상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앞에 놓인 문제는 최소 네 가지 역량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었다. 진품 감정은 그가 맡을 수 있었다. 시스템 분석은 진하의 영역이었다. 기술 인프라는 다나가 알고 있었다. 공개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도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평생 네 문장 이하로 말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미디어 전략을 짜야 하는 지금, 그 습관은 최악의 조건이었다. 진하의 아파트는 세 사람이 들어서자 즉시 좁아 보였다. 다나는 모니터 화면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울 어딘가의 다른 방에서, 그러나 지금 이 방에 함께 있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는 자료들이 쌓여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오사카에서 가져온 데이터, 진하가 밤새 정리한 파이프라인 구조도, 다나가 제공한 기술 문서들. 그리고 그 어느 것에도 담겨 있지 않은, 아무도 아직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질문들. "제네바 서밋이 6주 전입니다." 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학술 발표로 접근해야 해요. 정당한 플랫폼을 통해 연구 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가야 신뢰를 얻을 수 있어요." 다나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번졌다. "시간이 없어요. 학술 경로는 아무리 빨라도 6개월이에요. 언론에 데이터를 넘기면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고요." "DARA를 직접 봐야 합니다."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봤다. "AI가 핵심입니다. 열한 개 네트워크의 잔류물로 훈련된 것. 오사카에서 본 현상과 DARA가 지금 하는 것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면, DARA 자체가 증거입니다." "바르가가 허락할 리 없어요." 진하의 말에 에이드리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진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드리언. '내가 보면 안다'는 말로는 세상을 설득할 수 없어요. 바르가에게는 변호사 팀이 있어요. PR 팀이 있고...

23화: 수집 거점

에이드리언이 마지막으로 도시를 떠난 건 2년 전이었고, 나라를 떠난 건 5년 전이었다. 국제선은 그가 평생 정교하게 회피해 온 종류의 상황을 12시간 동안 강제했다. 밀폐된 공간, 타인과의 불가피한 근접, 출구 없음. 비행기에 오르고서야 그는 왜 그랬는지 다시 기억했다. 옆자리는 다나였다. 다나 이와이. 단정하게 뒤로 묶은 머리, 공학자 특유의 절제된 몸짓. 전직 파이프라인 기술자이자 현재 내부고발자 후보인 그녀는 에이드리언의 오사카 가이드로 좌석 배정을 받았다. 이륙 후 삼십 분 만에 그녀는 좌석 모니터의 AI 번역 서비스를 켰다. 에이드리언은 의도치 않게 화면을 봤고 즉시 눈을 돌렸다. "못 끄죠?" 다나가 옆에서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렇게 심해요?" 화면에서 번역 AI가 짧은 안내문을 여러 언어로 변환하고 있었다. 단순한 기능이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에게는 그게 보였다. 텍스트 아래에 침전된 것들이 지층처럼 층층이. 이 문장 구조는 사십대 여성이 쓰던 방식이었다. 저 어미는 특정 지역 출신이 자주 쓰던 것이었다. 이미 죽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리듬이 문장 전체를 타고 흘렀다. "시끄럽습니다."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인파 속 마지막 말들이 속삭이는 것 같은." 다나는 더 묻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그게 고마웠다.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좋은 자질이었다. 창밖을 봤다. 구름이 있었다. 구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가지 장점이 있군.' 오사카는 비가 내렸다. 다나의 연락처는 전직 동료였다. 파이프라인 인프라 구축을 담당했던 엔지니어로, 이제는 이 일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거점 위치를 알려주고 출입 코드를 건네는 선에서 끝냈다.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일본어로. 다나가 통역했다. 에이드리언은 이해했다. 어떤 사람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