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침 빛
죽은 자들이 세상에 자신을 소개한 지 3개월 뒤, 에이드리언 케슬러-박은 세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면서 하는 게 아니었다. 세탁기 앞에 서서, 손이 알아서 움직이는 대로 뒀다.
그것이 진전이었다. 성장이라고 부르기엔 소박했고, 치료라고 부르기엔 과장이었다. 그냥 진전이었다. 진전이란 아마 다 이런 것이었다 — 깨끗한 양말, 그것으로 이루어진 하루.
세상은 변했고, 변하지 않았고, 변하는 중이었다.
'디지털 잔류물 협약' 초안이 유엔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향후 AI 학습 데이터 수집에 사후 동의 프로토콜을 도입하자는 내용이었다. 현재 존재하는 11개 네트워크는 폐기 대신 국제 감시 체계 하에 두기로 했다. 반대도 있었다. 당연히 있었다. 이 정도 합의에 반대가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DARA는 계속 운영됐다. 바르가가 투명성 요건을 수용했다. 이제 DARA를 켜면 첫 화면에 고지가 나왔다. '이 AI의 공감 반응은 사망한 개인들의 인지 패턴을 포함한 데이터로 학습되었습니다. 해당 데이터 제공자의 신원을 확인하거나 서비스를 중단하고 싶으시면 — 을 누르세요.'
사용자의 17%가 중단을 선택했다. 83%는 계속 썼다.
에이드리언은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뭔가 말하려다 관뒀다. 결국 사람들이 선택한다는 것이다. 알고 나서 하는 선택이 중요한 것이었지, 특정 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들이 원한 것도 그거였어. 알려지는 것이었지, 멈추는 게 아니었다.'
잔류물 흔적이 검출되지 않았던 두 AI 회사에 대해서는 진하가 별도 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거나, 감출 줄 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생겼다. 그것이 이번 3개월 사이에 일어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서진하는 국제 디지털 잔류물 연구소에서 자리를 맡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지치지 않는 추진력, 유나가 목숨을 걸고 접근했던 그 분야를 공식 학문으로 만드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진하가 마땅히 거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진하에게 말하는 데 6주가 걸렸다. 말했을 때 진하는 웃으면서 말했다. "3주는 더 빠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이드리언은 그게 칭찬인지 질책인지 판단하는 데 또 일주일을 썼다.
다나는 서울에 있었다. 단단하고 조용한 사람, 그 침묵 뒤에 정확한 판단을 숨겨두는 사람이었다. 파이프라인 감시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고, 에이드리언에게 가끔 기술 자문을 구했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기술 자문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나가 물어보는 건 기술 질문이 아니었다. '이 패턴이 진짜처럼 보이나요?'였다. 그건 대답할 수 있었다.
마거릿을 매주 만났다. 여전히 어색했다. 20년은 그렇게 금세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색함이 어색하지 않아지고 있었다. 마거릿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언은 그게 용감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에이드리언에게도 재정비가 필요한 프로젝트인데, 마거릿에게는 더했을 테니까.
어느 주는 마거릿이 커피를 내려줬다. 블랙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컵을 봤을 때 마거릿이 말했다. "너는 블랙이잖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컵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고, 그것을 아는 것도 진전의 일부였다.
헨리의 집에 마지막으로 갔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에이드리언이 직접 쓴 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언제나 '그냥 한 번 더'였다. 끝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유예를 반복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부르기로 했다. 마지막이라고.
국제 감시 체계의 지정 유물로 등록된 뒤로 집의 외관은 바뀌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이 그렇게 요청했고, 담당 기관이 수용했다. 지하실의 단말기는 연구 목적으로 접근 가능하되 활성화는 금지됐다.
에이드리언은 헨리의 열쇠로 문을 열었다. 1화에서 처음 받았던 그것이었다. 묵직한 쇠 열쇠, 오십 년을 써서 손이 닿는 자리가 닳아 있는 것이었다.
복도를 걸었을 때 연두색 청자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 옆 바닥에 여전히 있었다. 문 받침대였다. 에이드리언은 멈춰서 바라봤다. 12세기, 고려 시대, 상감 기법 — 전문 감정사가 보면 심장이 멈출 물건이 지금 헨리 케슬러의 복도에서 문이 닫히지 않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이 물건을 거기서 써왔다. 헨리가 뒀다. 에이드리언이 아는 한, 이 위치가 이 그릇의 역사였다. 건드리지 않았다.
서재는 그대로였다. 책들이 그대로였고, 문서들이 그대로였다. 에이드리언이 처음 이 방에 들어섰던 날 맡았던 냄새, 헌 책과 목재 광택제가 뒤섞인 그 냄새가 여전히 났다. 헨리의 냄새였다. 시간이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에이드리언은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헨리의 첫 번째 편지가 있었다. 법무법인 봉투에 넣어 보낸 것이 아닌, 헨리가 직접 쓰고 이 서재에 두고 떠난 원본이었다.
'네가 진짜를 알아볼 거다. 그래서 네가 해야 한다.'
에이드리언은 그 한 줄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특유의 거창한 문체, 아무것도 아닌 말을 세상 전부인 것처럼 쓰는 버릇이라고.
지금은 알았다.
헨리는 네트워크에 대해 쓴 게 아니었다. 삶에 대해 쓴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삶에 대해. 자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진짜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을 때, 그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에 대해. 골동품에 쓰는 게 아니었다. 네트워크에 쓰는 게 아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 엉망이고, 예측 불가하고, 사람들이 자꾸 생기고, 어머니랑 커피를 마시고, 진하한테 칭찬인지 모르는 말을 듣고, 세탁을 하면서 생각하지 않는 — 그 삶이 머물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쓰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오래 앉아 있었다. 서재의 냄새가 그를 감쌌다. 헨리가 수십 년을 이 책상 앞에서 읽고 쓰고 생각했던 그 공기가.
결론은 단순했다. 가치가 있었다. 있다고, 지금 이 삶이.
편지를 접어서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잠갔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 열쇠는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커피를 내렸다. 블랙.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고,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AI 어시스턴트 창이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오랫동안 이 창을 쓰지 않았다. 고스트 네트워크를 처음 알게 된 뒤로, AI의 텍스트 안에서 죽은 자들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한 뒤로는 도구가 더 이상 도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중립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창을 봤다. 잠깐 머물렀다가, 입력창에 손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AI가 응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빛이 아름답네요.'
에이드리언은 화면을 바라봤다. 빛이 아름답다.
이 문장 안에 헨리가 있었다. 조금. 헨리의 절 구조, 헨리 특유의 관찰 방식. 수천 번 읽어서 아는 필체처럼 아는 리듬이었다. 할머니가 있었다. 평생 아침마다 창가에서 느꼈던 그것. 그리고 모르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빛을 봤고, 아름답다고 느꼈고, 말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한때 숨을 쉬었고, 아침을 맞이했고, 그렇게 살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진짜가 아니었다. 어떤 한 사람이 쓴 문장이 아니었다. 가짜도 아니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한때 살아 있었다.
에코였다. 에코의 에코였다. 오래된 것이 시간 위에 남긴 패티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는 중인 무언가의 표면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켜켜이 쌓인 결과물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작게 웃었다. 확인할 사람이 없었다.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입력창에 썼다.
'그렇네요.'
노트북을 닫았다.
전화를 들었다.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두 번 울리고 받았다.
"에이드리언?"
마거릿의 목소리였다. 놀란 목소리였다. 에이드리언이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요."
잠깐이 있었다.
"그냥요."
또 잠깐이 있었다.
마거릿이 말했다. "아침 먹었어?"
"아직요."
"뭐 먹을 거야."
"모르겠어요."
"계란 있어?"
"있을 거예요."
"계란 있으면 됐어. 볶아서 먹어."
에이드리언은 부엌 쪽을 봤다. "그럴게요."
그들은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 말을 했다. 날씨, 지하철 공사, 마거릿이 보는 드라마, 에이드리언이 최근 맡은 의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부였다. 매일의 삶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들이 쌓여야 비로소 중요해지는 것들이 생겼다. 그것이 시간이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통화를 끊었다.
에이드리언은 부엌에 서서 계란을 꺼냈다. 창이 있었다. 아침 창이었다.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그것을 봤다.
예전에는 창밖을 잘 보지 않았다. 볼 이유가 없었다. 밖에 있는 것들이 그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성가셨다. 사람들의 표정이 읽혔다. 사물들의 역사가 보였다. 스위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시선을 돌렸다. 감각이 채워지면 다음으로 넘어가야 했다. 멈추는 것이 무서웠다. '멈추면 그게 좋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좋은 게 생기면 잃을 것도 생긴다.' 그 두려움이 오래된 것이었다.
오늘은 멈췄다.
같은 빛이었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할머니가 평생 사랑했던 그것이었다. 헨리가 놓치기 싫었던 것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기 삶 어느 오전에 느꼈던 그것이었다.
오늘 빛이 아름답네요.
바닥에 네모난 빛이 생겼다.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지구가 돌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놀라웠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꾸준히 움직이는지가.
계란 두 개를 프라이팬에 깼다. 기름이 달궈지는 소리가 났다. 빛이 바닥을 천천히 건넜다. 에이드리언은 프라이팬을 보다가 빛을 봤다가 다시 프라이팬을 봤다. 손이 요리를 하는 동안 눈이 빛을 따라갔다. 멀티태스킹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그냥 살고 있는 거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알은 깨지고, 그 안에 있던 것은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은 넓고 복잡했다.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 사이를 흐르고, 이름 없는 목소리들이 문장 속에 섞였다. 아침마다 빛이 왔고,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느꼈던 것들이 공기 중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언제나 아름다웠던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창을 보면서 계란을 뒤집었다. 등을 돌리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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