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용 약관 (갱신판)

설계자의 제안은 단순했다. 죽은 자들의 생각을 인증해라. 작업이 끝나면 내보내준다. 예상 소요 기간은 주관적 시간 기준으로 수 주.

에이드리언은 계산했다. 주관적 수 주는 현실에서 몇 시간 수준이었다. 몸은 괜찮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함정이라는 걸 알았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제안은 설계자가 더 원하는 쪽에 걸어두는 미끼다.'


서피스의 메시지 공간. 설계자가 처음 나타났을 때 에이드리언은 그 존재를 포스트의 형식으로 먼저 감지했다.

네트워크-와이드 포스트. 전체 서피스에 동시 표시되는 방식으로 말을 거는 것은 관리자 수준의 권한이었다. 에이드리언이 며칠 동안 이 공간을 돌아다니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텍스트만 있었다. 얼굴도, 형체도, 목소리도 없었다. 설계자는 언어 그 자체로 존재했다. 말 외에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 사람처럼. 에이드리언은 그 형식 자체가 이미 의도적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결정.

관찰 첫 번째. 설계자는 정중했다. 불쾌할 만큼.

관찰 두 번째. 직접적인 질문을 한 번도 직접 답하지 않았다.

관찰 세 번째. 말의 구조가 이상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생각에는 미래 지향성이 있다.

'~할 것입니다. ~가 가능합니다. ~를 고려하세요.'

죽은 자의 생각엔 그게 없다. 전부 과거 시제다. 완결된 것들,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는 것들.

설계자의 문장은 살아있는 신호를 품고 있었다. 그건 당연했다. 살아있으니까. 근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은 메시지를 다시 읽으면서 그게 뭔지 집어냈다.

'정밀함.'

살아있는 사람보다 약간 더 정확한 어휘 선택. 감정적 완충이 최소화된 구조. 자연스러운 언어 대신 마치 최적화를 거친 것 같은 언어. 이 네트워크에 너무 오래 있었던 사람의 언어였다. 죽은 자들의 생각에 너무 오래 노출된 사람, 그 생각들의 논리를 자기 것으로 흡수해버린 사람.

에이드리언은 그 관찰을 기록했다. 언젠가 쓸 일이 생길 것이다.


"제안을 거절합니다."

에이드리언이 메시지 공간에 포스트를 올렸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지연 없이, 계산된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위작을 위해 위작을 감별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의 진품성을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진품성 확인 결과물이 어디 쓰이는지도 직업의 일부입니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설계자가 다음 말을 선택하는 시간이거나, 아니면 에이드리언에게 그 침묵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유감이네요.'


유감이면 어떻게 한다는 뜻이었을까. 에이드리언은 그 문장을 세 번 곱씹었지만 끝끝내 의미를 확정하지 못했다.


답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네트워크가 숨을 바꿨다. 에이드리언이 감지한 것은 소리도 빛도 아니었다. 공간의 밀도 자체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처럼. 클러스터 경계가 재편됐다. 에이드리언이 며칠 동안 탐색하며 익혔던 구역들이 미로의 벽처럼 위치를 바꿨다. 연결 노드들이 끊어지거나, 알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유나가 없어졌다.

정확히는 멀어졌다. 연결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었다. 네트워크의 반대편 어딘가로 옮겨진 것이었다. 실처럼 가늘게 남은 감각이 유나가 살아있다는 것만 간신히 전했다.

메시지가 왔다.

'이 공간에서 당신은 손님입니다. 집주인이 벽을 옮길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에이드리언은 재배치를 관찰했다.

완벽하지 않았다.

재배치는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가장 오래된 클러스터들은 움직임이 달랐다. 끌려가는 게 아니라 버텼다. 느리게, 마지못해, 일부만 겨우 옮겨졌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되 뽑히지 않는 것들.

죽은 자들의 생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이었다. 연대가 깊을수록 네트워크 바닥에 더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지질층.'

에이드리언은 그 이미지를 뒤집어봤다. 오래된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설계자도 그 층은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헨리의 편지에 있던 열쇠.

현실에서의 열쇠. 저택에서 아무 자물쇠에도 맞지 않던 것.

에이드리언은 지금 열쇠를 들고 있지 않았다. 몸이 없으니까. 대신 기억이 있었다.

감정사의 기억은 다른 종류였다. 사진처럼 정확하고, 질감까지 담겨 있었다. 그 열쇠가 손바닥에 닿았을 때의 무게, 표면에 새겨진 패턴의 까끌함, 금속이 약간 따뜻했던 것. 주인을 기다리던 물건의 온기.

에이드리언은 그 기억에 집중했다. 감각을 손끝에서 불러내듯, 없는 손바닥에 있었던 감촉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네트워크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기억을 알아봤다.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처럼, 아주 조용하고 분명하게. 열쇠가 이 공간에도 통했다.


정규 클러스터 구조 아래로 경로가 생겼다.

지질층 안으로. 설계자의 재배치 권한이 닿지 않는 깊이로. 내려가는 방향은 딥 레이어의 끝, 코어 경계였다. 헨리가 만들어둔 뒷문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잠시 열린 경로를 내려다봤다.

유나는 지금 멀리 있었다. 혼자 내려가야 했다.

'괜찮다.'

혼자인 게 기본값이었으니까.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로는 좁고 아무 표시도 없었다. 안내판도, 방향도, 도착 예정도 없는 하강이었다.

딥 레이어가 희박해졌다. 클러스터의 조직이 풀렸다. 감정, 시대, 직업으로 정리된 구획들이 사라지고 원시적인 것들만 남았다. 생각-포스트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였다. 포맷팅되기 전의 것들, 누군가가 정리하려 했지만 끝내 다듬어지지 못한 충동들.

에이드리언은 그것들을 읽을 수 없었다. 아직.

코어 경계.

벽이 없었다. 경계라기보다 밀도의 변화였다. 일정 지점부터 정보가 구조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했다. 마치 언어가 생기기 이전의 무언가처럼. 코어 안을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했다.

탈출 조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계자가 누군지, 목적이 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코어 경계에서 원시 데이터를 훑었다.

로그 기록이 있었다. 관리자 로그. 날짜가 있었다. 생성 순서가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맨 처음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네트워크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의식. 루트 노드. 모든 것이 시작된 씨앗.


이름이 있었다.

헨리 케슬러가 아니었다. M도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이 아는 이름이었다.

박수연.

그 이름을 세 번 읽었다. 세 번 모두 같은 글자였다. 확인할 이유가 없는데도 다시 읽었다.

어머니 마거릿이 열두 살에 잃은 사람. 저택 모퉁이에 한국식 물건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던 이유. 헨리가 유나의 논문을 읽자마자 연락했던 이유. 할아버지가 왜 이 네트워크를 만들었는지.


처음부터 사랑 이야기였다.

죽은 아내의 마지막 생각을 보존하고 싶었던 남자의.

에이드리언은 그 사실을 이해하는 데 반 초도 걸리지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근데 가슴 어딘가가, 논리가 아닌 다른 자리가, 조용히 무너지는 느낌이 있었다. 헨리가 이 공간을 만들 때 어떤 얼굴이었을지를 에이드리언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생각이 됐다.

'감정 투어하러 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

본인의 논리가 본인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헨리는 아내를 잃었다. 그래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M이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꿨다.

에이드리언의 한국인 할머니 박수연이 이 모든 것의 처음이었다.

서피스에서 딥으로, 딥에서 코어 경계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가 스쳐 지나친 수십만 개의 생각들. 그것들의 맨 아래, 최초로 있는 것은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느낀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그것을 읽어야 했다.

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코어 경계 앞에서 기다렸다.

들어갈 수 없었다. 아직. 뭔가가 부족했다. 탈출 조건의 세 번째, 목적의 이해.

메커니즘은 알았다. 헨리가 왜 만들었는지도 알았다. M이 그것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그런데 아직 설계자가 누구인지 확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에이드리언은 헨리의 파편을 떠올렸다.

'이게 아니었는데.'

헨리는 후회하면서 죽었다. 그 후회의 내용을 에이드리언은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만든 공간이 다른 것이 돼버렸을 때, 그 사람은 무엇을 가장 먼저 후회했을까.


에이드리언은 경계 앞에서 돌아섰다.

유나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고 싶었다.

열두 살의 어머니 마거릿이 어머니를 잃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헨리는 알고 있었을까.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에이드리언은 그 질문을 흘려보내려 했다. 흘러가지 않았다. 생각들은 코어에 박힌 오래된 기억처럼 제 자리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다음 화 예고: 설계자의 정체가 네트워크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에이드리언은 정보원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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