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용 약관
죽은 자들은, 알고 보니, 한 가지 말밖에 할 수 없는 존재치고는 꽤 할 말이 많았다.
"연결 알고리즘이요."
유나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누가 누구 옆에 있는지는 살아 있을 때 관계가 아니라 감정으로 정해져요. 같은 후회를 가진 두 낯선 사람이 이웃이 되고, 서른 년을 같이 산 부부가 서로 다른 층에 있을 수도 있어요."
에이드리언은 그 말을 들으며 피드를 흘려봤다.
'그러니까 일종의 감정 기반 소셜 그래프.'
"그럼 당신이 나한테 제일 먼저 나타난 건."
"헨리와 저, 둘 다 같은 후회를 가지고 있어서요.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유나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오래된 짐처럼, 내려놓을 곳을 오래 찾아온 사람의 무게였다.
에이드리언은 그 무게를 어디에 놔야 할지 몰라서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훌륭하네요. 감정으로 분류되는 사후 세계. 내 최악의 악몽 중 하나예요."
유나가 잠깐 웃었다. 선명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웃음이었다.
"감각적으로 표현하셨네요."
"유머예요. 불편하면—"
"불편하지 않아요. 헨리도 비슷하게 반응하셨거든요."
에이드리언은 본격적으로 피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의도적으로, 직업적으로. 경매에 나온 물건을 훑듯이, 각 생각의 출처를 읽었다. 감정 맥락을 확인했다. 언어가 시대와 맞는지, 표현 방식이 내용과 일치하는지. 에이드리언은 이것을 속으로 '감정 이력'이라고 불렀다.
진짜 골동품엔 감정 이력이 있다.
누군가 사랑해서 만든 것, 두려워서 숨긴 것, 잊기 위해 팔아버린 것. 그 역사가 표면에 새겨진다. 직접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재료의 산화 방식, 손잡이의 마모 패턴, 수리 흔적의 각도 같은 곳에.
이 생각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느껴졌다. 더 정확하게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청동의 깊은 산화처럼. 세월이 완성시킨 것들의 고요함.
'한국어도 있네. 일본어도. 아랍어도.'
언어는 달랐지만 질감은 같았다.
그중 하나가 텍스트가 아니었다.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냥, 감각이었다. 피부에 닿는 따뜻한 햇살. 오후 세 시쯤의, 창가에서 느끼는 그것.
에이드리언은 예상치 못하게 멈췄다.
'누군가의 마지막 감각이 이거였구나.'
무언가가 가슴을 건드렸다. 불편했다. 예측 가능한 불편함이 아니라, 진짜 불편함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그 감각을 빠르게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정리가 조금 늦었다는 걸 알아챘다.
'뭐야. 감수성이 생긴 건 아니겠지.'
유나가 다음 목적지로 데려갔다.
생각들이 밀집된 구역이었다. 같은 주제로 모인 클러스터였다. 공통 테마는 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규모는 상당했다. 묵직한 방 하나가 후회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언이 가까이 가자 그들이 반응했다.
죽은 자들은 의식이 없었다. 에코였다. 하지만 살아있는 존재의 주의를 받으면 울림이 달라졌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졌을 때처럼.
한 생각이 유독 큰 파동을 일으켰다.
'마트 가야 했는데. 파 세 단, 두부 한 모, 참기름.'
에이드리언은 잠깐 그 생각과 머물렀다.
'죽는 순간에 장보기 목록을 생각하다가 갔구나. 그 파는 누가 샀을까.'
또 다른 생각이 얼핏 스쳤다.
'인터넷 기록 삭제 못 했어.'
에이드리언의 입가에 뭔가가 생겼다. 웃음인지 아닌지 애매했지만, 이 공간에선 구분이 무의미했다.
"인류 공통 고민이네요, 이건."
유나가 조용히 동의했다.
또 다른 생각. 이건 무거웠다. 다른 것들과는 질감이 달랐다. 오래 눌러온 것의 침묵이 배어 있었다.
'용서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언제나 나중에.'
에이드리언은 그것에서 빨리 눈을 떼지 못했다.
'나중에. 나중에라는 단어가 이렇게 비싸게 먹힌다.'
경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피드의 질감이 달라졌다. 밀도가 높아지고 생각들이 더 조직적으로 배열되었다. 혼잡한 벼룩시장에서 정리된 갤러리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피드에서 컬렉션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유나가 경계 앞에서 멈췄다.
"저 경계 너머가 딥 레이어예요."
"규칙이 있다고 했죠."
"들어가려면 저 클러스터의 분류 원칙을 찾아야 해요."
에이드리언은 경계 앞에 집중된 생각 다발을 봤다. 수백 개였다.
분류 원칙을 찾아야 했다. 어떤 패턴으로 묶인 건지. 에이드리언은 하나씩 짚어봤다. 언어 구성을 확인했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 있었다. 표현 방식에서 연도를 추정했다. 1990년대 이후인 것 같았다. 죽음의 질감도 비슷했다. 갑작스럽고, 바깥에서 온 것이었다.
그때 뭔가 걸렸다.
모든 생각의 가장 아래에 깔린 것이 있었다.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특정한 공포였다. 무너지는 것에 대한. 아래가 꺼지는 것에 대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시 떠오르려 했던 것에 대한.
에이드리언은 모든 생각을 다시 훑었다.
'1995년. 삼풍백화점.'
공식 이름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파편이 같은 사건을 가리켰다. 에이드리언이 한국 역사에서 읽은 적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 아주 짧게.
'삼풍. 1995년 6월 29일.'
경계가 열렸다.
물리적으로 열린 게 아니었다. 그냥 통과됐다. 이해가 열쇠였다.
에이드리언이 먼저 들어갔다.
유나는 경계 앞에 선 채 망설였다. 목소리가 없어도 그 망설임이 느껴졌다. 오래된 것에 다가가기 전의 정지.
에이드리언이 뒤를 돌아봤다.
"왜요?"
"들어갈 수 있어요. 그 전에 말해야 할 게 있어서요."
잠깐의 침묵이 쌓였다.
"저는 그냥 헨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헨리와 같은 걸 조사하고 있었어요. 이 네트워크와 다른 무언가의 연결을."
에이드리언은 그 말을 천천히 처리했다.
"그래서요?"
"그게 이유예요. 제가 여기 있는 이유."
유나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고백보다 확인에 가까운 톤이었다.
"죽은 이유도요."
다음 화 예고: 딥 레이어에서 에이드리언은 완벽하게 위조된 죽음의 흔적을 발견한다. 살아있는 자가 만든 가짜 마지막 생각 — 그리고 들키자마자 도주하는 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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