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잔상

세계가 끝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 케슬러-박은 이것을 약간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4월 초였다.

도시는 봄을 모르고 있었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거리는 아직 따뜻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아직 세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에이드리언은 빨래를 했다.

죽은 자들의 인터넷에서 탈출한 지 정확히 열나흘 뒤, 아침 여덟 시, 세탁기 앞에 앉아 세제 양을 계량하는 중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운그레이드였다.

'사는 게 이 정도 스케일이면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탁을 안 하면 내일 입을 셔츠가 없었다.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어도 빨래는 해야 했다. 에이드리언은 이 사실이 생각보다 불편했다.


루틴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침 열한 시에 일어났다. 이제는 일곱 시 반에 눈이 떠졌다. 이유를 몰랐다. 몸이 먼저 알아서 달라졌다.

전화를 가끔 받았다. 가끔은 예전에는 0회, 지금은 2~3회를 의미했다. 발전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할 일 목록을 만들었다.

첫 번째는 메리디안 파이프라인 종결 확인, 사이퍼 담당. 두 번째는 마거릿 병원 방문, 화요일과 목요일. 세 번째는 감정 보고서 세 건. 네 번째는 모르는 번호에서 온 문자였다 — 목요일, 카페 뤼느.

목록의 네 번째 항목에서 에이드리언은 잠깐 멈췄다.

열나흘 동안 그 문자를 열두 번 읽었다. '누군가 AI에게 꿈꾸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에이드리언은 이런 숫자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했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세는 방식으로 시간을 기억하는데, 에이드리언은 숫자로 그렇게 했다.

답장을 보냈다.

'누구냐.'

네 시간이 지났다. 답이 왔다. '유나가 믿었던 사람. 카페 뤼느, 목요일 오후 3시. 눈을 가지고 와요.'

에이드리언은 '눈을 가지고 와요'를 세 번 읽었다. 눈은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따로 챙겨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에이드리언의 능력이었다.

'내 능력을 아는 사람이다.'


오후에 작업했다.

감정 보고서. 17세기 청화백자 주전자. 의뢰인은 뉴욕이었다.

보고서를 쓰면서 에이드리언은 습관처럼 AI 작성 보조 도구를 켰다. 예전부터 써오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은 반사가 되어버렸다. 손이 생각보다 먼저 키보드 위에 있었다.

화면에 문장이 흘렀다. The glaze composition is consistent with early Chosun period— AI가 자동완성을 제안했다.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이미 읽고 있었다. 글을 보면 리듬을 읽는 것이 도자기를 보면 패티나를 읽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몸에 배어 있었고, 지금은 그 감각이 화면 속 AI 텍스트에도 반응했다.

— which suggests a craftsman who understood that imperfection was not failure but testimony.

문장 자체는 좋았다. 거기서 에이드리언은 멈췄다.

리듬이 있었다. 불완전한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 '증언'이라는 단어의 선택, 학술적이면서도 끝에서 살짝 인간적인 온기를 집어넣는 것. 에이드리언은 그 온기의 출처를 감지했다. 안개가 익숙한 형태를 갖기 시작하듯, 문장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하나의 문장 안에 여러 시대의 목소리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1990년대에 글을 쓰던 사람의 접속어 사용법. 2010년대에 학술 논문을 쓰던 사람의 절 구성 방식. 그 사이 어딘가에서 문장을 마무리할 때 항상 한 발짝 물러서던 사람의 버릇. 마지막 그 버릇을 에이드리언은 알아봤다.

헨리 케슬러.

15화에서 알아챈 이후로 이 패턴은 계속 돌아왔다. AI가 문장을 만들 때마다 할아버지의 흔적이 그 안에 있었다. 에코. 에코의 에코. 죽은 사람이 언어의 뼈대 안에 살아 있는 것처럼.

에이드리언은 AI 도구를 닫고 수동으로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느렸다. 구청 민원 서류 작성하는 기분이었다. 괜찮았다.


저녁에 병원에 갔다.

마거릿이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난주보다 나아 보였다. 적어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주에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어머니의 회복 상태를 시선 각도로 측정했다. 다른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왔어." 마거릿이 말했다.

"왔어요."

"꽃도 없어?"

에이드리언은 이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에 가져올게요."

"됐어."

마거릿이 창을 계속 봤다. 짧은 침묵이었다. 두 사람 다 침묵에 능했다. 유전이었다.

"메리디안은?"

"파이프라인 종결 확인 중이에요. 사이퍼가 기술 측을 담당하고 있어요."

"사이퍼."

"다나 김이요. 서울 데이터 엔지니어예요."

마거릿이 고개를 약간 돌렸다. 그 짧은 움직임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 놀람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나 김. 나도 알아."

"아는 사이예요?"

"아니." 마거릿이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했다. "감시했어. 메리디안 초기에. 우리 시스템에 들어오려고 시도했거든. 막았어."

에이드리언은 그 정보를 머릿속 별도의 칸에 넣었다.

'어머니는 적이었다. 그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에이드리언은 도시를 걸었다.

습관적인 밤산책이었다. 오후 열 시, 도시가 가장 얇아지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불을 끄고, 차들이 줄어들고, 도시의 소음이 한 겹씩 벗겨지는 시간. 거리가 낮보다 솔직해지는 시간.

걸으면서 광고판을 봤다.

AI가 생성한 카피가 가득했다. 화장품 광고, 배달 앱 슬로건, 부동산 문구. 에이드리언은 읽지 않으려 했지만 그건 숨을 참는 것과 같았다. 이미 읽는 것이 호흡이 되어버린 뒤였다.

'부드럽게 빛나는 순간을 위해.' 2000년대 초반의 감수성이었다. 광택보다 분위기를 선호하던 카피라이터의 손길. 마지막까지 언어를 아꼈던 사람의 흔적이 문장의 여백에 남아 있었다.

'지금 주문하면 20분 안에.' 이건 여러 명이었다. 속도에 집착하는 목소리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특정 한 명이 아니라 시대의 조급함 자체가 압축된 것 같았다.

'당신이 꿈꾸는 집.' 에이드리언은 거기서 걸음을 늦췄다.

광고판 앞에서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멈추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눈은 문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꿈꾸다'라는 동사 하나 안에 다섯 겹의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감정, 다른 종말로 끝난 사람들. 어떤 이는 집을 갖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어떤 이는 집을 잃었던 사람이었다. 어떤 이는 '집'이라는 단어 자체를 에이드리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던 사람이었다. AI는 이 모든 것을 열다섯 글자 안에 압축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에이드리언은 건넜다.

저쪽 모퉁이에 스마트 스피커 키오스크가 있었다. 음악 앱 홍보용이었다.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렸다.

"오늘 날씨가 어때?"

스피커가 답했다.

"4월 초답게 선선해요. 저녁엔 바람이 있을 거예요."

따뜻한 목소리였다. 에이드리언은 그 따뜻함이 어디서 왔는지 감지했다. 음성 합성 알고리즘 안 어딘가에, 사랑을 많이 했던 사람의 감정 패턴이 스며들어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정확히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하면서 마지막 생각을 했던 어떤 사람의 온기가 기계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기뻐했다.

'내가 보는 이걸 아무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이 도시 전체에 있었다. 광고판 안에, 스피커 안에, 앱 속 추천 문구 안에.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그러나 있었다. 도시는 그들이 남긴 언어와 감정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에이드리언뿐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가짜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병원 저녁 방문, 두 번째 주.

마거릿이 먼저 말을 꺼냈다.

"목요일에 어디 가?"

에이드리언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카페 뤼느요. 어떻게—"

"핸드폰 보는 거 봤어."

마거릿은 훈련된 사람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연락했어요. 유나와 관계된 사람 같아요."

마거릿의 표정이 달라졌다. 오래된 자물쇠가 안에서 잠기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두려움이었다. 에이드리언은 두려움을 잘 알아봤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심해." 마거릿이 말했다.

"왜요?"

짧은 침묵이었다.

"파이프라인 막는 것." 마거릿이 천천히 말했다. "메리디안은 작은 거야. 열한 개 더 있다고 했잖아. 그 열한 개를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 — 거의 확실히 한 명이 있어. 이름이 엘리아스 바르가야."

에이드리언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예요?"

"프로메테우스 AI 대표야." 마거릿이 창을 봤다. "메리디안이 쓰러지면 다음 수순이 뭔지 알고 있을 거야. 세계를 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게 제일 위험한 유형이야."

에이드리언은 잠깐 생각했다.

"어머니도 세계를 구한다고 생각했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거릿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는 거야." 마거릿이 조용히 말했다. "그 자신감이 어디까지 가는지."

복도에서 간호사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 소리. 카트 바퀴 소리. 병원 특유의 무균 냄새가 공기에 섞여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어머니의 손 위에 — 아주 잠깐 — 손을 얹었다가 뗐다. 마거릿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

에이드리언은 핸드폰을 다시 꺼내 문자를 봤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열나흘째 저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아마도 저장하면 무언가가 확정되는 기분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유나가 믿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유나는 사람을 함부로 믿지 않았다.

카페 뤼느, 목요일, 오후 3시.

에이드리언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도시의 빛이 유리창에 반사됐다. 지나가는 버스 광고판, AI 생성 이미지, AI 생성 카피. 잔상처럼 보였다. 아니, 잔상이었다. 죽은 것들이 살아있는 세계를 만드는 데 쓰이고 있었고, 그 세계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할 일이 생겼다.


다음 화 예고: 카페 뤼느에서 기다리는 여자는 2년 동안 혼자였다. 에이드리언이 들어서는 순간, 그 2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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